첫눈에 반했다고 혼인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방이 호응하고, 그 상대방 집안이 허락을 해야 성사되는 법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녀는 이성계를 택했고, 소녀의 집안도 이성계와의 결혼을 허락했다. 아니, 아주 적극적으로 이성계와의 혼사를 원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성계는 아버지뻘 나이이고, 부인이 있으며, 자식도 여덟이나 있는 유뷰남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젊고 예쁘고, 머리까지 좋은 처녀가 시집을 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지금까지 역사가들은 강씨 집안을 개경에서 제법 내노라하는 가문이라고 해석해왔다. 하지만 그런 가문에서 이런 결혼을 허락할 리가 없다. 본인이 아무리 원했어도 집안 반대에 부딪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소년의 집안을 들여다보면, 할아버지는 강서라는 인물로 원나라 지배기 때 충혜왕에게 아첨하여 벼슬을 얻었다. 충혜왕은 조선의 연산군보다 더 패륜을 일삼는 왕이었다. 강서는 그 패륜 행각에 동조하여 충혜왕의 호감을 산 덕분에 잠시 영화를 누렸으나 충숙왕이 복위하면서 순군옥에 갇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강서에 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에 더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은 강서의 아들들이다. 강서에겐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윤귀를 시작으로 윤성, 윤충, 윤의, 윤휘, 윤부 순이다. 이들 중에 둘 째 윤성이 소녀의 아버지이고, 사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셋 째 윤충이었다. 이들이 부귀영화를 누린 시절은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3대였다. 특히 충혜왕이 죽은 후에 강윤충은 대비였던 원나라 공주 이렌첸빤과 부부처럼 지냈기 때문에 대단한 권력과 부를 누렸다.
하지만 그들의 부귀영화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공민왕은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면서 친원파였던 강윤성과 강윤충도 역도로 지목하여 몰락시켰다. 강윤성뿐 아니라 그의 자녀들도 모두 친원 세력으로 몰아 역적이 되었다. 강윤성에게는 득룡, 순룡, 유권, 계권 등 아들 넷과 딸 둘이 있었는데, 막내딸이 강씨 소녀였다.
아들 중 득룡은 재상급 벼슬을 지냈고, 둘째 순룡은 원나라 승문감 소감 벼슬에 있었다. 또 큰딸은 신귀에게 시집갔는데, 신귀는 왕의 권력을 능가하던 신예(고려 후기의 간신)의 동생이었다. 그런 집안이 공민왕의 배원정책이 실시된 이후로 일순간에 몰락한 것이다. 강윤충, 신귀는 모두 역모죄로 사형당했고 강씨의 오빠 중에는 강순룡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이에 강씨 집안은 개성에 살지 못하고 고향 곡산으로 쫒겨 가야 했다.
강윤성의 집안이 몰락한 것은 강씨 소녀가 태어난 직후였다. 따라서 그녀가 이성계를 만난 십 대엔 아버지와 삼촌, 오빠, 형부가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가난하게 살던 때였다. 역적 집안이라 손을 내미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가산은 기울어 괜찮은 집안에 시집갈 여지도 없던 터라 잘나가던 전쟁 영웅 이성계를 선택했을 수 있다. 이성계는 몰락한 그녀의 집안을 일으켜 세울 유일한 희망이었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줄 든든한 동아줄이었을 것이다.